
내 맘에 쏙 드는 싱싱한 대파를 사왔다. 단단하게 잘 자란 대파를 쫑쫑 자르다가 그 안쪽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초록색 부분을 잘라 보면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둥근 형태를 단단하게 유지하고 있고, 안쪽에는 희고 촉촉한 조직이 보인다. 지금은 이래도 며칠이 지나면 색이 변하고 힘이 빠지면서 흐물흐물해지는 대파. 대파 한 단을 썰다가 대파에 대해 공부해 보기로 했다. 식물에 대한 궁금증의 일환으로. 그러다가 언어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1. 하나로 보이는 대상을 구분지어 이름 붙인다
일상에서는 대파의 길쭉한 부분을 모두 ‘줄기’라고 부르기 쉽다. 그러나 식물학에서는 그것을 더 세밀하게 구분한다. 초록색의 관처럼 생긴 부분은 주로 잎몸이고, 아래쪽의 흰 부분은 여러 장의 잎 밑부분이 겹쳐 만들어진 잎집이다. 줄기처럼 보이지만 실제 줄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위경(pseudostem)’, 즉 ‘가짜줄기’라는 이름도 붙였다. 이런 용어가 중요한 까닭은 어려운 말을 하나 더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전에는 하나로 보이던 대상 안에서 서로 다른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2. ‘단단하다’라는 느낌을 설명하는 언어
싱싱한 대파를 만지면 분명히 ‘힘이 있다’는 느낌이 난다. 식물학에서는 이 막연한 촉감을 몇 가지 개념으로 풀어낸다. 식물 세포 바깥에는 ‘세포벽(cell wall)’이 있고, 그 안에는 ‘셀룰로오스(cellulose)’라는 섬유성 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 이 물질들은 세포가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형태를 지탱한다. 여기에 세포 안의 물이 세포벽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팽압(turgor pressure)’이 더해진다. 그래서 “대파가 탱탱하다”라는 일상적인 표현은 ‘세포에 물이 충분하고, 그 물이 세포벽을 밀며, 세포벽이 그 압력을 견디고 있기 때문에 조직 전체가 빳빳하게 유지된다’라는 설명으로 바뀐다.
3. 속이 비어 있지만 단단히 서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대파의 초록색 잎은 가운데가 비어 있다. 그런데도 상당히 길게 뻗어 있으면서 쉽게 꺾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형태’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종이 한 장은 쉽게 휘지만 돌돌 말아 원통으로 만들면 훨씬 단단해진다. 대파의 잎도 비슷하다. 속이 비어 있는 관 모양은 적은 재료로 긴 몸을 지탱하기에 유리한 구조다. 그러므로 대파가 서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셀룰로오스 같은 재료, 세포의 팽압, 속이 빈 원통형 구조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의 현상을 설명할 때 여러 요소를 나누어 살피고, 다시 그 관계를 문장으로 조직해 왔다.
4. ‘시든다’는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대파를 며칠 두면 흐물흐물해진다. 우리는 흔히 “시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안에서도 여러 현상이 일어난다. 수분이 줄면서 팽압이 떨어지고, 세포가 힘을 잃는다. 엽록소가 감소하면 색이 누렇게 변하기도 하고, 시간이 더 지나면 조직이 물러지며 미생물이 번식해 부패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식물학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한 덩어리로 부르는 현상을 ‘시듦’, ‘황변’, ‘연화’, ‘부패’처럼 다시 나누어 본다. 비슷하게 보이는 현상도 원인과 과정이 다르면 서로 다른 말로 구별하는 것이다.
5. 자르는 순간 일어나는 변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대파를 자르면 특유의 강한 냄새가 갑자기 퍼진다. 그냥 놓여 있을 때보다 칼을 댔을 때 냄새가 훨씬 강하다. 온전한 세포 안에서는 여러 물질이 서로 떨어져 있지만, 칼이 세포를 자르면 그 경계가 무너지면서 그동안 분리되어 있던 성분과 효소가 만나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파 특유의 향과 매운맛을 만드는 물질들이 생겨난다. “파를 썰었더니 냄새가 났다”라는 짧은 문장 안에도 ‘세포 손상-물질의 접촉-화학 반응-새로운 물질 생성-냄새 감지’라는 과정이 숨어 있다.
6. 대파의 색 분석하기
대파의 초록색과 흰색도 인간은 단순히 “색이 다르다”고만 보지 않았다. 초록색은 ‘엽록소(chlorophyll)’라는 색소와 관련되고, 엽록소가 있는 세포에서는 광합성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반대로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분에서는 엽록소가 적게 만들어져 희게 보인다. 이렇게 되면 ‘초록색’은 단순한 색의 이름이 아니라 빛, 엽록소, 광합성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인간은 자연에서 보이는 색, 모양, 촉감, 냄새를 그대로 두지 않고 차이를 찾아내고, 그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묻고, 반복되는 관계에 이름을 붙여 왔다.
7. 언어는 면면의 관찰을 지식으로 바꾼다
인간은 관찰한 차이를 언어로 구별하고, 이름을 붙이고, 비슷한 것끼리 묶고, 다른 것을 나누고, 원인과 결과를 연결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 다음 사람은 그 문장을 읽고 다시 관찰하고, 수정하고, 더 정확한 개념을 만들었다. 그렇게 지식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축적될 수 있었다.
‘세포’, ‘세포벽’, ‘셀룰로오스’, ‘팽압’, ‘엽록소’ 같은 말들은 인간이 자연을 오래 관찰하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낸 ‘사고의 흔적’이다. 각각의 단어 안에는 “이것과 저것은 다르다”, “이 현상에는 이런 원인이 있다”, “이 과정은 이런 순서로 진행된다”라는 수많은 관찰과 추론이 압축되어 있다. 언어는 이미 만들어진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만이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고, 나누고, 연결하고,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사고 자체를 조직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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