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랫폼 유리창 싯구에서 생각의 꽃을 피우다
신도림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플랫폼 유리창에 붙어 있는 시 한 편을 보았다. 주경숙의 「매화꽃 필 무렵」이라는 시민공모작이었다.
매화꽃 필 무렵
주경숙 (2025 시민공모작)
고향집이란 말속에는/ 그리움이 살고 있다/ 그리움 속에는 매화꽃 닮은/ 엄마가 살고 있다
고단한 삶의 겨울 건너/ 서러운 바람 다 품고/ 봄이 소문도 나기 전/ 마디마디 생을 틔우신 당신
아이들 떠나고 혼자 남은 집/ 금강소나무 한 그루/ 보고픈 눈물 머금고/ 그리운 마음으로 서 있는 저물녘
매실밭 가득 꽃구름 불을 밝힌다/ 멀리 있는 나, 길 잃지 말라고/ 대낮처럼 환히 그리움을 밝혀준다
‘고향집’은 세 글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세 글자를 읽는 순간 생각은 세 글자 안에 머물지 않는다. 고향의 집이 떠오르고,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어린 시절과 떠나온 시간이 뒤따라올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마당이나 대문, 명절에 찾아가던 길이 떠오를 수도 있다. 짧은 언어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을 불러낼 수 있을까. 이 시를 한 줄씩 따라가 보면 읽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고향집’이라는 말에서 생각이 시작된다
우리가 ‘고향집’이라는 글자를 읽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글자의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 글자가 ‘고향집’이라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말의 소리와 의미에 접근한다. 고향집은 ‘고향에 있는 집’이다.
단어를 안다는 것은 사전적 의미를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고향집’이라는 말을 읽자마자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고향집이 떠오른다. 집의 모양이나 마당, 부모의 얼굴, 어린 시절의 냄새와 소리까지 따라올 수 있다. 오래전에 고향을 떠난 사람이라면 떠나오던 날이나 부모를 두고 돌아서던 순간이 떠오를 수도 있다.
이때 ‘고향집’이라는 말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작은 말 하나가 뇌에 이미 저장되어 있던 지식과 경험에 닿으면서 관련된 것들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시인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인다. “고향집이란 말속에는 그리움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움은 실제로 말속에서 살 수 없다. ‘살다’는 원래 사람이 집에서 살고, 생명체가 어떤 곳에서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말속’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리움’을 살게 한다.
독자는 이 이상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움직인다. 집에는 사람이 산다. 마음속에는 기억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고향집’이라는 말 안에도 오랜 기억과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는 성립하지 않는 문장을 만나자 이미 알고 있던 ‘살다’의 의미를 다른 영역으로 옮겨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낸다. 은유를 이해하는 순간 뇌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연결이다.
이어지는 표현은 “매화꽃 닮은 엄마”다. 매화꽃과 엄마는 전혀 다른 대상이다. 하나는 꽃이고 하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시인이 둘을 연결하는 순간 독자는 질문하게 된다. 어머니의 무엇이 매화꽃과 닮았을까. 이때 매화에 관해 알고 있던 지식이 필요해진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아직 따뜻한 봄이 완전히 오기 전부터 가지마다 꽃망울을 틔운다. 단정하고 고운 꽃의 모습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시어들이 이 연상을 더욱 밀어준다.
“고단한 삶의 겨울 건너/ 서러운 바람 다 품고”
여기서 겨울은 계절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춥고 견디기 힘든 겨울의 성질이 어머니가 지나온 고단한 삶과 겹쳐진다. ‘서러운 바람’도 마찬가지다. 바람은 몸을 스치고 흔들고 때로는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바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서러운 일들과 연결된다.
특히 시인은 바람을 피했다고 하지 않고 “다 품고”라고 한다. ‘품다’라는 말에서는 힘들고 서러운 일을 하나하나 문제 삼기보다 그것까지 안고 묵묵히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읽는 동안 독자의 머릿속에서는 원래 따로 있던 두 세계가 만난다. 겨울과 바람과 매화가 있는 자연의 세계와, 고생하고 견디며 자식을 키운 한 어머니의 삶이 연결된다. 한쪽에 관해 알고 있던 지식이 다른 쪽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다.
“봄이 소문도 나기 전”에 생각은 더 멀리 간다
“봄이 소문도 나기 전”이라는 표현은 더욱 재미있다. 봄이 어떻게 소문을 낼 수 있을까. 실제로 누군가 “봄이 왔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표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여기저기 새싹과 꽃이 나타나 사람들이 봄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를 ‘봄이 소문나는 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매화는 그보다 먼저 핀다. 봄이 오기는커녕 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꽃을 피운다. 그래서 다음 구절인 “마디마디 생을 틔우신 당신”이 깊어진다. 매화나무가 추위 속에서도 가지의 마디마다 새 생명을 틔우듯, 어머니 역시 형편이 좋아지기를 기다린 뒤에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다. 고단한 시절 한가운데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먹이며 삶을 이어 왔다.
처음 ‘매화꽃 닮은 엄마’를 읽었을 때 막연했던 의미가 뒤에 나오는 ‘겨울’, ‘바람’, ‘봄’, ‘마디마디 생’과 만나면서 점점 구체적으로 변한다. 읽기는 앞에서 얻은 의미를 그대로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뒤에 오는 말을 만나면서 앞의 의미까지 계속 고쳐 가고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소나무 한 그루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본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은 집을 떠난다. “아이들 떠나고 혼자 남은 집 금강소나무 한 그루” ‘금강소나무’라는 말에서도 독자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 움직인다. 소나무는 계절이 바뀌어도 푸른빛을 유지한다.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는 나무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 모습이 바로 앞의 “아이들 떠나고 혼자 남은 집”과 만나자 새로운 장면이 만들어진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고향집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시에는 ‘어머니는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자식들을 기다렸다’고 쓰여 있지 않다. 그러나 독자는 두 표현을 연결하여 그 뜻을 만들어 낸다.
이어지는 “보고픈 눈물 머금고”에서는 ‘머금고’라는 동사가 생각을 더 움직인다. 눈물을 쏟는 것이 아니다. 눈물을 안에 담고 있다. 보고 싶은 마음도, 외로운 마음도 밖으로 다 쏟아내지 않고 삼키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그 한 단어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시간은 ‘저물녘’이다. 저물녘은 해가 지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일하던 사람도 일을 멈추고, 주변의 움직임도 조금씩 잦아드는 때다.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생각나기 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낮에는 바쁘게 움직이다가 저녁이 되어 멀리 타지에 나가 있는 가족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여기에 ‘저문다’라는 말이 가진 또 다른 느낌도 겹쳐진다. 하루가 저문다는 말에서 어느덧 나이가 들어가는 한 사람의 삶을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한 단어에서 시작한 생각이 시간과 삶의 의미로까지 뻗어 나간다.
말들이 모여 눈앞에 없는 장면을 만든다. 마지막에는 매실밭에 매화가 가득 핀다.
“매실밭 가득 꽃구름 불을 밝힌다”
매화가 한꺼번에 피어 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꽃들이 구름처럼 펼쳐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꽃구름’이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서 다시 “불을 밝힌다”고 한다. 꽃은 전등이 아니므로 실제 불을 켤 수 없다. 환하게 핀 수많은 꽃의 모습을 빛을 밝히는 일과 연결한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빛의 의미가 달라진다. “멀리 있는 나, 길 잃지 말라고/ 대낮처럼 환히 그리움을 밝혀준다.” 고향집의 환한 꽃은 이제 멀리 떠나 있는 자식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밝혀 주는 불빛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리움’까지 밝힌다. 여기에서 밝혀지는 것은 실제 길만이 아니다. 고향집도 밝아지고, 어머니의 얼굴도 밝아지고, 오래전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시간도 밝아진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 다시 선명해지는 것이다.
독자는 실제 매화밭 앞에 서 있지 않다. 어머니도 눈앞에 없다. 고향집도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글자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는 집이 있고, 매화가 피어 있고, 소나무가 서 있고, 저녁이 오고, 그곳에 자식을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다.
언어는 눈앞에 없는 세계를 마음속에 만들어 낸다.- 시에 쓰이지 않은 것까지 읽게 되는 이유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까지 떠올린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이 시에 직접 쓰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 자식들이 공부 때문에 떠났는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갔는지도 알 수 없다. 어머니가 저녁마다 자식들을 생각했다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독자는 그 빈 곳을 채운다. ‘고향집’, ‘아이들 떠나고’, ‘혼자 남은 집’, ‘보고픈’, ‘멀리 있는 나’ 같은 표현을 서로 연결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가족의 삶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보탠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과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의 경험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그 시대의 풍경까지 떠올릴 수 있다. 자신의 부모를 고향에 남겨 두고 살아 본 사람이라면 개인적인 기억이 그 위에 겹쳐질 수도 있다.
뇌는 텍스트에 적힌 정보만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읽고 있는 말과 관련된 기억을 찾고, 세상에 관해 알고 있던 지식을 불러오고, 서로 떨어져 있던 개념을 연결하고, 그 결과를 이용해 글에 없는 부분까지 추론한다. 그렇게 해서 몇 줄의 언어를 하나의 살아 있는 상황으로 만든다.
같은 시를 읽어도 머릿속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같은 시를 읽는다고 해서 모든 독자의 머릿속에 같은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나온 사람에게 ‘고향집’은 실제 집의 구조와 마당, 냄새, 부모의 얼굴, 떠나오던 날까지 불러낼 수 있다. “아이들 떠나고 혼자 남은 집”을 읽으며 늙은 부모를 고향에 두고 돌아왔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도시에서 자랐지만 부모에게 고향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성장한 사람은 조금 다르다. 자신의 직접적인 기억보다는 할머니 댁, 명절 귀성,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 영화나 노래에서 보았던 고향의 모습이 의미를 채울 수 있다.
젊은 독자는 ‘고향집’의 사전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그 말에서 불러낼 개인적 기억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할머니나 부모의 삶을 연결하여 전혀 다른 방식으로 깊이 읽을 수도 있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고향집’, ‘엄마’, ‘매화꽃’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두 알아도 왜 이 말들이 ‘떠남-기다림-그리움’이라는 정서로 이어지는지는 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고국에 부모를 두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이주민이라면 “멀리 있는 나, 길 잃지 말라고”라는 한 줄이 오히려 강한 개인적 기억을 건드릴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나 국적만이 아니다. 그 언어와 연결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과 기억이 독자의 머릿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시어가 때로는 ‘암호’처럼 느껴지는 까닭
이 점은 시가 왜 때때로 어려운지도 설명해 준다. 시는 많은 것을 생략한다. ‘매화’라고 쓰고 매화가 왜 중요한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금강소나무’라고 쓰고 소나무의 어떤 성질을 떠올려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저물녘’이라고 쓴 뒤 그것이 외로움이나 노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풀어 주지 않는다. 시인은 몇 개의 말만 놓는다. 나머지는 독자가 움직여야 한다.
매화가 추운 때 일찍 피는 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매화꽃 닮은 엄마’에서 많은 것이 열린다. 소나무의 푸름과 한결같음을 알고 있다면 ‘금강소나무 한 그루’에서 또 다른 의미가 열린다. 고향을 떠나 본 경험이 있다면 ‘멀리 있는 나’에서 개인의 기억까지 들어온다.
연결할 것이 많으면 짧은 시어 하나가 넓은 생각의 세계를 연다. 연결할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않으면 같은 시어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한 줄이 다른 사람에게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암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읽는 동안 뇌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다시 처음의 ‘고향집’으로 돌아가 보자. 독자는 먼저 글자를 알아보고 단어의 의미에 접근한다. 그런데 곧 그 단어와 관련된 지식과 기억이 활성화된다. ‘고향집’에서 가족과 어린 시절이 나오고, ‘매화’에서 추위와 이른 봄이 나오며, 그것이 어머니의 고단한 삶과 연결된다. ‘겨울’과 ‘바람’이라는 자연의 경험은 삶의 시련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옮겨 간다. ‘소나무’에서는 한결같음과 기다림이 떠오르고, ‘저물녘’에서는 하루의 끝과 노년의 시간이 겹쳐진다.
그렇게 불려 나온 것들은 다시 서로 연결된다. 집, 어머니, 매화, 겨울, 자식, 소나무, 저녁, 기다림, 멀리 떠난 ‘나’가 하나의 상황 안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독자는 낱말을 따로 읽는 것이 아니라 ‘떠난 자식과 고향에 남아 기다리는 어머니’라는 하나의 세계를 마음속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자신의 삶이 들어온다.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날 수도 있고, 고향을 떠났던 날이 떠오를 수도 있다. 자신에게 그런 경험이 없다면 부모 세대의 이야기나 영화와 노래에서 접한 장면이 들어올 수도 있다. 언어가 기억을 부르고, 기억이 감정을 움직이며, 감정은 다시 그 문장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언어는 뇌를 활성화한다. 읽는 동안 뇌에 저장되어 있던 언어 지식, 세계 지식, 개인적 기억, 문화적 경험, 시각적 심상, 정서와 추론이 차례로 불려 나오고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의미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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