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과 음독
不敢以爲能 至德足以質天 而不敢以爲多(불감이위능 지덕족이질천 이불감이위다)
使其雍穆粹闇然 隱約於容儀(사기옹목수암연 은약어용의)
雖善鑑者 止不免盡其識 不知者疑其爲野人如也(수선감자 지불면진기식 부지자의기위야인여야)
然直其所經緯天地 運斡理數之內畜者(연직기소경위천지 운알리수지내축자)
參互東西學說 折衷歸斷 無一非翼聖右道 扶王斥霸之至意至法(참호동서학설 절충귀단 무일비익성우도 부왕척패지지의지법)
斯豈近世諸儒之所可知者哉(사기근세제유지소가지자재)
惜乎 道與時塞 終作空言而止而已矣(석호 도여시색 종작공언이지이이의)
嗚呼 予小子不孝學劣 不能奉承義教 而輕犯世好(오호 여소자불효학렬 불능봉승의교 이경범세호)
學於中年 挈家淸州 己復于京(학어중년 설가청주 기부우경)
此雖不敢逆府君意 亦未必非小子之計(차수불감역부군의 역미필비소자지계)
而惑之生此 竟使府君不得安土考終(이혹지생차 경사부군부득안토고종)
而奄忽易簀於京旅(이엄홀이책어경려)
乃庚寅五月初一日也 享年六十五(내경인오월초일일야 향년육십오)
適以北匪騷亂 權厝于忘憂里 後七……(적이북비소란 권조우망우리 후칠……)
현대어 직역
공은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감히 여기지 않았고, 지극한 덕이 하늘에 견줄 만하더라도 그것을 많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 온화하고 엄숙하며 순수하고 깊은 덕은 겉모습에 희미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사람을 잘 알아보는 이조차 공의 됨됨이를 모두 알아보기 어려웠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를 시골의 평범한 사람으로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의 내면에는 천지의 이치를 조직하고 이치와 수의 운행을 다룰 만한 학문이 축적되어 있었다.
동서양의 학설을 서로 참조하고 절충하여 판단한 것이 어느 하나 성인의 가르침을 돕고 바른 도를 높이며 왕도를 붙들고 패도를 물리치려는 지극한 뜻과 법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를 어찌 근세의 여러 유학자가 쉽게 알 수 있었겠는가?
안타깝게도 도와 시대가 서로 막혔으므로, 끝내 실현되지 못한 말이 되고 말았다.
아아, 불효하고 학문이 부족한 이 아들은 아버지의 의로운 가르침을 받들어 계승하지 못하고 세상의 풍조를 가볍게 좇았다.
중년에 공부하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청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옮겼다.
이 일이 비록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한 반드시 어린 아들의 계책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러한 잘못에서 일이 생겨 끝내 아버지께서 고향에서 편안히 천수를 마치지 못하게 하였다.
갑자기 서울의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은 경인년 5월 초하루였고, 향년은 65세였다.
마침 북쪽 공산군의 소란 때문에 망우리에 임시로 장사 지냈으며, 그로부터 7년 뒤…….
현대어 의역
평재는 학문과 덕이 깊었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덕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의 온화하고 엄숙한 인품은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잘 알아보는 이조차 그 깊이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저 순박한 시골 선비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천지와 인간 사회의 원리를 통찰하는 깊은 학문이 쌓여 있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학설을 폭넓게 비교하고 절충하였으며, 그 판단은 성인의 가르침과 바른 도를 높이고 도덕적인 왕도를 지키며 힘에 의존하는 패도를 배척하는 데 귀결되었다. 시대를 앞선 이러한 학문을 당시의 유학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시대적 상황마저 그의 뜻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과 구상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글과 말로만 남았다.
행장을 쓴 아들 권영복은 자신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계승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중년에 공부하기 위해 가족을 청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이주한 일로 인해 아버지까지 객지에 머물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가 고향에서 편안히 임종하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평재는 1950년 음력 5월 1일 서울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진 전쟁과 혼란 때문에 고향으로 곧바로 모시지 못하고 서울 망우리에 임시로 안장하였다.
참고
質天(질천): 하늘에 견주거나 하늘에 물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지극함을 뜻한다.
雍穆(옹목): 온화하면서도 엄숙한 모습.
粹闇然(수암연): 순수한 덕이 깊이 감추어져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상태. 사진의 글자는 ‘粹闇然’으로 판독하였다.
隱約於容儀(은약어용의): 내면의 덕이 몸가짐과 외모에 희미하게 드러남.
善鑑者(선감자): 사람의 됨됨이나 재능을 잘 알아보는 사람.
野人(야인):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사는 사람. 여기서는 학문적 깊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순박한 시골 사람이라는 뜻이다.
經緯天地(경위천지): 천지의 이치를 날줄과 씨줄처럼 조직적으로 파악함.
運斡理數(운알리수): 사물의 이치와 운행 법칙을 통찰하고 다룸.
內畜(내축): 학문·덕행·재능을 내면에 깊이 쌓아 둠.
參互(참호): 여러 학설이나 자료를 서로 비교하고 참조함.
折衷歸斷(절충귀단): 여러 견해의 장단점을 헤아려 절충한 뒤 최종적인 판단을 내림.
翼聖右道(익성우도): 성인의 가르침을 돕고 바른 도를 높임. 右는 여기서 ‘돕다, 숭상하다’라는 뜻이다.
扶王斥霸(부왕척패): 도덕에 기초한 왕도는 지지하고 무력과 권세를 앞세우는 패도는 배척함.
道與時塞(도여시색): 자신이 추구한 도가 시대 현실에 막혀 펼쳐지지 못함.
府君(부군):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
安土考終(안토고종): 살던 고향에서 편안히 천수를 다하고 임종함.
易簀(역책): 임종하거나 세상을 떠남. 증자가 임종할 때 대자리를 바꾸게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京旅(경려): 서울의 객지 또는 서울에서의 나그네 생활.
庚寅(경인): 문맥상 1950년. 평재가 1886년에 태어나 65세로 사망했다는 앞의 기록과 일치한다.
北匪騷亂(북비소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당시 문집 편찬자의 관점에서 표현한 말. ‘북쪽 공산군의 난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權厝(권조): 장지를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신이나 관을 임시로 안치함.
忘憂里(망우리): 현재 서울 중랑구 망우동 일대. 당시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면의 後七(후칠)은 뒷면의 年丙申(년병신)으로 이어져 “7년 뒤인 병신년에”라는 문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