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과 음독
君于府北位良里第(군우부북위량리제)
府君天品篤厚沉潛甫齒已知爲學(부군천품독후침잠 보치이지위학)
而才思逸出成童以家大人荷汀公命遊學于李響山盧小訥諸先生之門(이재사일출 성동이가대인하정공명 유학우이향산 노소눌 제선생지문)
受聞識悅至忘寢食曰道在是矣(수문식열 지망침식 왈도재시의)
自是篤志強學殆力可至無所不極其致(자시독지강학 태력가지 무소불극기치)
頓及復乎四書六經之旨(돈급복호사서육경지지)
浸淹乎諸子百家之說(침엄호제자백가지설)
及其見解精透而確有定力(급기견해정투 이확유정력)
輒復喟然曰士當識時務(첩부위연왈 사당식시무)
今天下競騖於西學(금천하경무어서학)
其所經理天地而政治法律機器運用莫不以之出(기소경리천지이 정치법률기기운용 막불이지출)
斯亦不可不知(사역불가부지)
乃傍治窮討網羅剖決得其所源委而歸質於吾學(내방치궁토 망라부결 득기소원위 이귀질어오학)
各有所著書以明天文地理陰陽曆術日月星辰運行歷次南北極低昂地球沿革頃畝結負井地均田之論(각유소저서 이명천문지리음양역술 일월성진운행역차 남북극저앙 지구연혁 경무결부 정지균전지론)
현대어 직역
부군은 관아 북쪽 위량리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군의 타고난 성품은 돈후하고 침착하여, 어린 나이부터 이미 학문할 줄 알았다.
재주와 생각이 뛰어났으며, 소년이 되자 집안 어른인 하정공의 명을 받아 향산 이 선생과 소눌 노 선생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가르침을 받아 듣고 깨닫는 것을 기뻐하여 잠자고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으며, “도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웠으며,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학문의 깊은 뜻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거듭 『사서』와 『육경』의 뜻에 깊이 들어갔다.
제자백가의 학설에도 오래도록 깊이 잠겼다.
마침내 그 견해가 정밀하고 투철해졌으며, 확고하게 판단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문득 다시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시대의 형편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천하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서양 학문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들이 천지를 경영하고 정치·법률과 기계를 운용하는 방법은 모두 그 학문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또한 알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서양 학문을 곁들여 연구하고 철저히 탐구하여, 여러 내용을 망라하고 분석해 그 연원과 흐름을 파악한 뒤 우리 학문에 돌아와 대조하고 검증하였다.
각 방면에 저술을 두어 천문·지리·음양·역술, 해와 달과 별의 운행 및 차례, 남극과 북극의 높낮이, 지구의 변천, 경·무와 결·부의 토지 측량, 정전과 균전의 이론을 밝혔다.
현대어 의역
평재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진중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아버지 하정공의 뜻에 따라 향산 이만도와 소눌 노상직 등 당대의 학자들을 찾아가 배웠고, 배움의 기쁨에 잠과 식사까지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다.
그는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육경에만 머물지 않고 제자백가의 사상까지 폭넓게 섭렵하였다. 깊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학문적 판단력이 굳어졌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선비라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양 학문이 세계의 정치·법률·과학기술을 움직이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철저히 연구하였다. 다만 서양 학문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그 기원과 체계를 분석한 뒤 유학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수용하려 했다.
그 결과 천문학과 지리학, 달력과 별의 운행, 지구와 극지, 토지 측량과 토지제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연구하고 저술하였다. 이 대목은 평재가 전통 유학자이면서도 근대의 과학·법률·제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음을 잘 보여 준다.
참고
天品篤厚沉潛(천품독후침잠): 타고난 성품이 인정 있고 온후하며, 차분하고 깊이가 있다는 뜻.
甫齒(보치): 막 이를 갈 무렵의 어린 나이, 곧 유년기를 뜻한다.
成童(성동): 어린아이를 벗어나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울 나이가 된 소년.
家大人(가대인): 자신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하정 권중우를 가리킨다.
李響山(이향산): 향산 이만도(李晩燾, 1842~1910)로 보인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경술국치 뒤 단식 순국하였다.
盧小訥(노소눌): 소눌 노상직(盧相稷, 1855~1931)로 보인다. 영남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忘寢食(망침식): 자고 먹는 것마저 잊을 만큼 한 가지 일에 몰두함.
四書六經(사서육경): 사서는 『논어』·『맹자』·『대학』·『중용』이며, 육경은 유학의 기본 경전 여섯 종을 말한다.
浸淹(침엄): 어떤 학문이나 사상에 오랫동안 깊이 잠겨 연구함.
諸子百家(제자백가): 중국 고대의 여러 사상가와 학파 및 그 저술을 통틀어 이르는 말.
士當識時務(사당식시무): “선비는 마땅히 시대의 형편과 과제를 알아야 한다.” 평재가 서양 학문을 연구하게 된 문제의식을 보여 주는 핵심 문장이다.
競騖於西學(경무어서학):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서양 학문을 추구한다는 뜻.
經理天地(경리천지): 천지와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이용하거나 다스림.
政治法律機器運用(정치법률기기운용): 근대 서양의 정치제도·법률체계·과학기술과 기계 운용을 가리킨다.
傍治窮討(방치궁토): 본래의 학문과 함께 다른 학문도 폭넓고 철저하게 연구함.
網羅剖決(망라부결): 관련 내용을 두루 수집하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판단함.
源委(원위): 사물의 시작과 끝, 곧 기원과 전개 과정.
歸質於吾學(귀질어오학): 서양 학문의 내용을 유학으로 돌아와 대조하고 검증한다는 뜻.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유학적 기준에 따른 선택적 수용을 말한다.
曆術(역술): 달력을 만들고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학문.
歷次(역차): 천체가 운행하는 순서와 경로.
南北極低昂(남북극저앙): 관측 지점에 따라 달라지는 남극과 북극의 고도. 전통 천문학과 근대 지리학의 접점을 보여 준다.
頃畝結負(경무결부): 경·무와 결·부 등 전통적인 토지 면적 및 조세 산정 단위.
井地均田(정지균전): 정전제와 균전제 같은 전통적 토지 분배 제도에 관한 논의.
이 대목은 앞서 나온 평재의 일본 유학 전승과도 잘 연결된다. 다만 이 면 자체에는 일본이나 메이지대학이 직접 언급되지 않고, 서학·정치·법률·기계 및 자연과학을 연구했다는 사실만 명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