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과 음독
于淸州(우청주)
己卯遂自淸州卜居于漢城之嘉會坊(기묘수자청주복거우한성지가회방)
至庚寅以六十五歲歿(지경인이육십오세몰)
時五月初一日也(시오월초일일야)
適値兵亂(적치병란)
權厝于忘憂里(권조우망우리)
越七年丙申(월칠년병신)
返葬于故土宜寧華林山麓庚坐之原也(반장우고토의령화림산록경좌지원야)
配一直孫氏承憲女(배일직손씨승헌녀)
格齋聲瑞后(격재성서후)
丙午卒(병오졸)
祔公墓左(부공묘좌)
有三男三女(유삼남삼녀)
男寧福寧軾寧敏(남영복영식영민)
女適李炳允崔芝永朴炳銘(녀적이병윤최지영박병명)
寧福男五喆(영복남오철)
寧軾男五鉉五平五珍五基(영식남오현오평오진오기)
寧敏男彰焄五鐘(영민남창훈오종)
餘不盡錄(여부진록)
公有遺稿五卷(공유유고오권)
其中雜著多可觀(기중잡저다가관)
撮其要而論之(촬기요이론지)
一曰歲差說及潮汐說(일왈세차설급조석설)
廣採東西古今之說(광채동서고금지설)
而證石谷李氏所論之非是也(이증석곡이씨소론지비시야)
二曰頃畝結負攷及讀星湖均田論(이왈경무결부고급독성호균전론)
歷擧吾邦田制之沿革(역거오방전제지연혁)
極論兼幷之爲害(극론겸병지위해)
而深致意於星湖均〔다음 쪽의 ‘田之論也’로 이어짐〕
(이심치의어성호균전지론야)
현대어 직역
청주에 거주하였다. 기묘년에 마침내 청주를 떠나 한성의 가회방에 살 곳을 정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65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날은 5월 초하루였다. 마침 전란을 만났기 때문에 우선 망우리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7년째 되는 병신년에 고향인 의령 화림산 기슭의 경좌 언덕으로 모셔 와 다시 장사 지냈다.
배우자는 일직 손씨로, 승헌의 딸이며 격재 성서의 후손이다. 병오년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 왼쪽에 모셨다.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아들은 영복·영식·영민이다. 딸들은 각각 이병윤·최지영·박병명에게 출가하였다.
영복의 아들은 오철이다. 영식의 아들은 오현·오평·오진·오기이다. 영민의 아들은 창훈·오종이다.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공에게는 다섯 권의 유고가 있었다. 그 가운데 잡저에는 볼 만한 글이 많으므로, 그 중요한 내용을 추려 논한다.
첫째는 「세차설」과 「조석설」이다. 동서양과 고금의 여러 학설을 널리 수집하여 석곡 이씨가 논한 내용이 옳지 않음을 논증하였다.
둘째는 「경무결부고」와 「성호균전론을 읽고」이다.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변천을 차례로 열거하고 토지 겸병의 폐해를 극력 논하면서, 성호의 균전론에 깊은 뜻을 두었다.
현대어 의역
평재는 청주에서 생활하다가 1939년 서울 가회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앞면의 내용을 함께 고려하면, 이러한 이주는 자녀들에게 더 나은 학문적·문화적 환경을 마련해 주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평재는 1950년 음력 5월 1일,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전란으로 인해 곧바로 고향에 모시지 못하고 서울 망우리에 임시로 안장하였다. 이후 병신년인 1956년에 고향 의령의 화림산 기슭으로 묘를 옮겼다. 부인 일직 손씨는 병오년에 세상을 떠난 뒤 평재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
평재 부부에게는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세 아들은 영복·영식·영민이며, 세 딸은 각각 이병윤·최지영·박병명과 혼인하였다.
이어지는 기록에는 세 아들의 아들들이 적혀 있다. 영복에게는 오철, 영식에게는 오현·오평·오진·오기, 영민에게는 창훈·오종이 있었다. 다만 이 기록은 모든 후손을 빠짐없이 적은 완전한 족보가 아니라, 일부 후손만 기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고 마무리한 약식 계보기록이다.
평재가 남긴 원고는 모두 다섯 권이었다. 글쓴이는 그중에서도 여러 학술적 논설을 모은 잡저에 주목할 만한 글이 많다고 평가하였다.
「세차설」과 「조석설」에서는 천문 현상과 밀물·썰물의 원리를 탐구하였다. 평재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근대의 여러 학설을 폭넓게 검토하고, 이를 근거로 석곡 이씨의 견해가 옳지 않음을 논증하였다.
「경무결부고」와 「성호균전론을 읽고」에서는 우리나라 토지의 측량·과세 제도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소수의 권세가나 부유층이 토지를 대규모로 차지하는 겸병의 폐해를 비판하고, 성호 이익의 균전론에 깊은 관심과 공감을 나타냈다.
참고
女適(녀적): 딸이 누구에게 출가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女適李炳允崔芝永朴炳銘’은 세 딸의 배우자가 각각 이병윤·최지영·박병명이라는 의미이다.
男(남): 계보 기록에서 ‘아들’을 표시한다. ‘寧福男五喆’은 “영복의 아들은 오철이다”라는 뜻이다.
五喆(오철): 사진상 마지막 글자는 ‘喆’로 판독된다. ‘喆’은 ‘철’로 읽으며 ‘哲’의 이체자이다.
五鉉(오현): 사진상 둘째 글자는 ‘鉉’으로 판독된다. ‘현’으로 읽는다. 기존 판독의 ‘五鐘’이 아니라 ‘五鉉’이다.
餘不盡錄(여부진록):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페이지의 명단이 당시의 모든 자손을 망라한 것은 아니다.
祔公墓左(부공묘좌): 공의 묘 왼쪽에 가까이 모셨다는 뜻이다. 같은 봉분에 합장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보다, ‘공의 묘 왼쪽에 안장하였다’고 옮기는 것이 정확하다.
一直孫氏(일직 손씨): 본관이 일직인 손씨이다. 원문의 ‘配一’과 다음 세로줄의 ‘直孫氏’가 이어져 ‘配一直孫氏’가 된다.
越七年丙申(월칠년병신): 경인년인 1950년을 첫해로 헤아리면 병신년 1956년이 일곱 번째 해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