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주민 재현과 미디어 리터러시
영화는 사회의 다양한 인식과 감정을 반영하는 문화적 거울로 작용합니다. 소수자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표현될 때 영화는 실제하는 오해와 왜곡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관점에서 볼 때, 소수자를 등장시키는 콘텐츠는 그들의 삶을 ‘누가’, ‘어떤 시선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구성했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주민을 다룬 많은 영화들 중 대표적인 몇 작품을 살펴보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리터러시 역량'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크래쉬》(Crash, 2004), 《그린 카드》(Green Card, 1990), 《트래픽》(Traffic, 2000), 《황해》(2010)는 모두 이민자 혹은 다문화적인 맥락에서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한 작품입니다. 이들 영화는 단지 대중적 오락을 넘어 사회적 의제를 제기하려 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으며, 실제로 여러 영화제에서 그 진취성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민자의 삶을 진정성 있게 반영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크래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충돌하는 현대 도시의 단면을 교차 구성 방식으로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인종과 이민자에 대한 묘사를 지나치게 대칭적으로 단순화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인종 간의 갈등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정되고, 등장인물들이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전개 방식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주민이나 소수자 집단에 속한 인물들은 개별적인 맥락이나 삶의 깊이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상징적인 역할만 부여되거나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도구로 그려졌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인종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소비하게 만들고 관객이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제한하는 구조로 이어졌습니다.
《그린 카드》는 위장결혼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결혼을 택한 프랑스 남성과 미국 여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작품은 이민 제도의 구조적 문제나 이주민의 현실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로맨스를 강조하는 전개 속에서 이민자의 복잡한 감정과 처지에 대한 접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민 제도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고, 주인공인 프랑스 남성은 미국 여성의 성장을 위한 조력자처럼 묘사되어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이민 문제를 단지 서사의 배경으로 활용하고, 웃음과 사랑을 중심에 놓으면서도 그 안에 담긴 사회적 긴장과 불균형은 가볍게 지나쳐 버렸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트래픽》은 미국과 멕시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마약 밀매의 구조를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이 범죄자 이미지로 반복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등장인물 중 멕시코 출신 캐릭터들은 대부분 마약 밀매와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그들이 왜 그러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나 내면적 동기는 거의 제공되지 않습니다.
미국 내부의 피해자적 관점에 초점이 맞춰지고 이주민들의 인간적 동기나 내면은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문제 해결의 중심이 미국 내 권력자들의 선택이나 결단에 의해 좌우되고 이주민은 주변적 존재로만 그려집니다. 이는 미국 중심의 시선을 강화하는 한편, 국경을 넘어 살아가는 이들의 복잡한 삶을 단순한 틀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황해》의 주인공 김구남은 조선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는 생계를 위해 한국에 밀입국해 청부살인을 수행합니다. 이 작품은 조선족을 가난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묘사하여 실제보다 왜곡된 고정관념을 강화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선족 인물들이 불법체류자이자 범죄자로만 그려지며 이주민의 복잡한 삶과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주민 재현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민자와 다문화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공통적으로 이주민을 독립적 주체로 그려내지 못하거나 고정관념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분명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만, 그 방식에서 진정성이 결여되거나 일방적 시각이 개입되는 한계로 관객에게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영화 《미나리》(2020)
줄거리
영화 《미나리》(2020)는 1980년대 초, 미국 아칸소주로 이주한 한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아버지 제이콥은 한국 채소를 재배하여 미국 시장에 판매하려는 꿈을 품고 가족과 함께 낯선 시골로 이사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아내 모니카는 아들의 건강 문제와 불안정한 생활에 대한 걱정으로 갈등을 겪고 부부는 자주 다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가 한국에서 건너와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며, 손자 데이비드와의 관계를 통해 가족 간의 유대감이 깊어집니다.
순자는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집 근처 개울가에 심으며, 미나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임을 강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나리는 가족의 삶과 희망을 상징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제이콥의 농장 운영은 가뭄과 거래 취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부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됩니다. 그러던 중 순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가족이 외출한 사이 농작물 창고에 불이 나면서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족은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고 제이콥은 가족과 함께 농장에 머무르기로 결심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콥과 데이비드는 순자가 심은 미나리를 수확하며 새로운 시작을 암시합니다.
영화는 이민자 가족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갈등을 그리면서도 가족 간의 사랑과 희망을 통해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미나리라는 식물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도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영화제 수상
영화 《미나리》(2020)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윤여정),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스티븐 연), 각본상 등을 휩쓸었고,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윤여정), 감독상, 남우조연상(앨런 김)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총 54개의 수상과 138개의 후보 지명을 기록하며, 한국계 미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담아낸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
찬사의 이유
이 작품이 이민자의 삶을 그려낸 영화로서 돋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소재의 신선함이나 캐릭터의 특수성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이민자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에 있습니다.
《미나리》는 이민자의 삶을 고통과 비극의 서사로만 소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민자 영화가 현실의 어려움과 차별, 절망을 강조하며 서사를 끌어가곤 하지만, 《미나리》는 그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합니다. 물론 이 영화 속에도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부부 갈등 등 현실적인 고난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극적인 장치가 아니라 삶을 이루는 일부로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제이컵이 땅을 일구고, 모니카가 아이를 돌보며,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장면들은 '고통'이라는 키워드로서 초점화되기보다 더 강한 ‘삶의 지속성’과 ‘희망의 뿌리내림’을 보여줍니다. 관객은 이민자 가족을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비추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이민자 가족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족 내부의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카메라는 제이콥의 시선에서 농장의 실패를 바라보고, 아들 데이비드의 눈높이에서 할머니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따라가며, 아내 모니카의 침묵 속에서 무너지는 감정을 포착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민자의 삶을 외부의 시선으로 판단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서 출발하는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 점은 관객에게 이민자의 삶을 대상화하지 않고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민자의 삶은 양국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는 정체성 혼란의 틀로 해석되곤 하는데, 《미나리》에서는 이민자의 정체성을 단순히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의 이분법 속에 가두지 않고 훨씬 더 복잡하고 현실적인 층위로 느끼게 합니다. 부모는 한국어로 말하고 아이들은 영어로 반응하며, 전통적인 외할머니 순자는 미국 땅에 적응하려 애쓰고, 생계를 위한 농장은 철저히 미국의 시스템 안에서 운영됩니다. 가정 안의 다양한 모습이 언어, 문화, 세대, 제도 등이 얽혀 있고 단순히 한쪽의 문화로 귀속되지 않으며, 혼종적인 정체성의 역동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요소들을 단순하게 풀어서 설명하거나 정리하려 들지 않고 삶 속에 자리하는 갈등과 화해의 장면들이 다양하게 연결됩니다.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순자라는 인물은 이민자 가족의 세대 간 간극을 잇는 상징적인 역할을 합니다. 손자인 데이비드와의 첫 만남에서, 화투를 치고 낯선 냄새를 풍기는 할머니를 손자는 낯설어하며 경계합니다. 하지만 할머니(윤여정) 순자는 억지로 사랑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맺습니다. 붕대를 감아주고 장난을 받아주고, 손자와 함께 미나리를 심는 추억의 시간들은 세대 간의 감정과 문화의 간극을 메워가는 정서적 학습의 과정으로 그려집니다. 할머니 순자는 단순히 ‘옛날 사람’이나 ‘보조적 인물’이 아닌, 변화의 주체이자 정서적 중심축으로 자리하는 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습니다.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어떤 방식으로 삶의 서사를 구성하는가와 같은 질문에서 깊은 찬사를 받습니다. 특정 교훈을 설교하거나 그들이 겪는 고통을 감정적으로 과장하지도 않습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삶의 장면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다가가며 문화와 생활이 어떻게 얽히는지에 대해 평온하고 나직하면서도 뚜렷한 모습으로 느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미나리》라는 작품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라, 삶의 보편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이야기로서 전 세계의 관객과 평론가에게 지속적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오락 콘텐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과 태도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중요한 매체로 작용합니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물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인물의 설정, 사건의 전개, 장면의 선택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특정한 감정을 유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소수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재미 요소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화가 만들어진 방식과 구조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읽는 리터러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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