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주관적”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정서 상태, 기억, 기대, 신념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해석합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인지의 특성이며, 모든 사람은 이러한 필터를 통해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주관성은 때로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이나 지각 왜곡(perceptual distortion)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자신을 과도하게 낮춰보거나 높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왜곡되게 추측하거나, 과거의 감정을 현재 상황에 투사하는 등 다양한 오차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편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인간 인식의 본질적인 속성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경험, 감정, 가치관, 문화적 배경 등을 통해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합니다. 이는 단순한 성격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 작용의 본질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바로 ‘인지적 스키마(cognitive schema)’입니다. 인지적 스키마는 “경험을 통해 형성된 정신적 틀(mental framework)”로서,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 기준이 되는 선행 구조를 말합니다. 인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사건, 말, 표정, 장면 등)를 인식의 제로(영) 상태 곧 모든 인식이 비어 있는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미의 그릇'에 따라 분류하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윗 사람에게 자주 혼났다면 세월이 흘러 직장에서 상사가 조언만 해도 ‘혼나는 것 같다’고 느끼기 쉬운데 이는 기존의 경험이 새로운 자극의 해석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틀렛(F. C. Bartlett, 1932)은 <기억(Remembering)>이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은 낯선 문화권의 관습이나 이야기를 자기 문화에 맞게 해석하거나 각색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스키마)은 자동적으로 작동하며, 대개 의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이 진실’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내가 구성한 현실일 수 있는 것이지요.
▮2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현실 감각의 저하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직접 만지는 경험은 줄어들고, 결제는 카드나 모바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스마트폰과 디지털 미디어는 인간의 시선, 주의력, 관계 맺는 방식뿐 아니라 ‘현실을 감각하는 방식’까지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게임과 영상 속 자극적인 장면에 익숙해지고, 생명에 대한 감각과 도덕적 거리감도 흐려지는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합니다. 몸으로 겪는 경험보다 ‘터치’와 ‘클릭’이 먼저 학습되고, 사람과의 만남은 얼굴을 마주하는 물리적 관계보다 텍스트나 화면을 통한 접촉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린 점점 감각을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의존하게 됩니다.
현실 감각은 약해지고 감정의 반응도 빠르고 단편화되며 관계는 깊이보다 속도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오랜 시간 쌓인 신뢰, 함께한 경험, 상호 이해와 공감 같은 관계의 ‘깊이’가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속도, 메시지를 얼마나 빠르게 읽고 답변하는지에 따라 친밀감이나 관심의 정도가 평가됩니다. 우리 감각은 디지털 정보에 더욱 민감해지는 반면, 실제 세계에서 느끼는 감각은 조금씩 둔해지고 있습니다.
20세기 미디어 이론의 선구자인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은 “매체 자체가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혁명적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 1964) 그는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매체를 사용하는가’가 그 안에 담긴 콘텐츠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준다고 보았습니다. 동일한 내용의 뉴스이더라도 TV로 전달될 때와 신문으로 전달될 때, 인간이 받아들이는 방식과 사회적 파급력은 전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미디어의 형식이 인간이 지각하는 내용, 사유 방식, 생활 패턴을 재구성한다는 통찰을 1960년대에 내놓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마치 지금의 인터넷, SNS, 메타버스 시대를 예견한 것 같습니다.
▮3 왜 '현실 감각'이 중요할까
현실 감각은 단지 ‘생각’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로 느끼는 감각적 인지입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무엇이 실제 존재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각하는 힘인 것이지요.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런데 디지털 환경에서는 실제로 보지 않고도 ‘보는 듯한’ 환상을 줍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문자 기반의 디지털 대화에서는 실제 사람의 말소리, 얼굴 표정, 행동 정보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극히 일부의 정보만을 디지털화된 기호로 주고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디지털 정보는 시각 중심이고 다른 감각들(촉각, 청각, 후각, 미각, 운동감각)은 거의 배제되거나 둔감해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TV 모두 ‘화면’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글, 이미지, 영상, 이모지, UI/UX 디자인 등 시각적 기호를 주된 소통 수단으로 합니다.
손가락 끝으로 터치하는 행위는 ‘온도, 질감, 압력’ 등을 느끼는 촉각 자극과는 거리가 멉니다. 입체감, 온기, 재질의 차이를 느끼는 일이 없고, 그저 평평한 유리 화면 위의 추상적 동작만 반복됩니다. 몸은 정지하고 눈만 움직이는 것이지요. 디지털에서는 눈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몸은 멈춰 있습니다. 오직 ‘눈-뇌’ 루트만 과도하게 활성화 됩니다. 디지털 경험은 우리의 경험을 시각 중심으로 축소시키고, ‘무게감, 따뜻함, 거리감’과 같은 현실과 연결된 깊이 있는 감각의 균형을 잃게 합니다.
현실 감각이란, 내가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감각으로, 내 몸이 ‘실제’에 주변 환경에 연결되어 있는 인식이며, 생활 속에서 교류하는 타인의 반응과 세계의 피드백을 통해 조절됩니다.
현실 감각은 인지 능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남력은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인식을 말하며, 이는 현실 감각의 핵심 기반입니다. 지남력이 흐려지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내가 누구와 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워지는데 이것은 치매 초기 증상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의력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각이 둔해지면 외부 세계에서 오는 자극이 제대로 감지되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들을 놓치게 됩니다. 이는 현실 세계와의 연결을 점차 약화시키게 됩니다. 기억력도 감각 자극과 관련이 깊습니다. 감각을 통해 풍부하게 받아들인 정보는 뇌에 맥락과 함께 저장되지만, 감각 자극이 빈약하면 저장 자체가 어렵고 기억력도 자연히 저하됩니다.
현실 감각이 약해지면 방이 어질러져 있어도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자주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잘 읽지 못하고, 오로지 디지털 화면에만 몰입하면서 주변 환경에는 무감각해지는 경향도 나타납니다. 현실 감각을 유지하고 감각적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삶의 태도는 인지 건강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타인의 말을 오해하거나 과도하게 해석하게 되어 단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감정이 타인과의 교류 없이 내 안에서만 맴돌고 독백처럼 고립될 경우,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감정이나 생각이 자연스러운 피드백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채로 행동으로 이어질 때 조급하거나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리고는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게 되면 만성 피로, 무기력, 공허감과 같은 상태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4 자기 피드백 능력(현실 검증력)은 훈련될 수 있다
현실 검증력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충분히 길러질 수 있는 힘입니다. 현실 감각이란 단순히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감정이나 생각이 실제 상황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점검하고, 실제 세계와 나 사이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상 속에서 몇 가지 실천을 통해 현실 감각을 단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관찰 일기’를 쓰는 것은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면서 ‘나는 왜 그렇게 느꼈는가’, ‘내가 본 것이 전부일까’ 등을 스스로 묻고 정리해 보는 좋은 방법에 해당합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은 주관적인 경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라는 근거를 스스로에게 묻고, ‘혹시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을까’라는 반증 가능성을 탐색하는 습관도 매우 좋은 습관입니다.
피드백은 현실 감각을 조율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타인의 말투, 표정, 반응, 때로는 침묵조차도 우리가 말하고 행동할 때 참고해야 할 중요한 신호입니다. 반론이나 인정, 수용, 거절과 같은 피드백은 우리가 내린 판단이나 감정이 적절했는지 점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대로 피드백을 무시하거나 단절되면, 사람은 점점 자기 생각에만 몰입하게 됩니다. 이는 현실로부터의 단절을 불러오고, 과도한 자신감이나 지나친 자기 비하로 이어지며,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거나 판단이 일관성을 잃는 등의 오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실 감각이란 다양한 감각과 사고를 통해 외부 세계와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힘이며, 이러한 연결을 의식적으로 관리하고 조율하는 과정 자체가 곧 현실 검증력의 훈련입니다.
▮5 건강한 삶을 위한 언어(화용) 역량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을 넘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고 조율하는 매개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언어는 현실 감각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정교한 장치이고, 그 중심에 ‘의미 협상’과 ‘피드백’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한 세계와 상대가 이해한 세계는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다름을 좁혀 나가고, 공통의 맥락을 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대화를 이어갑니다. 질문을 던지고, 설명을 보완하며, 때로는 침묵 속에서 수신자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조율 과정이 바로 의미 협상인 것이지요.
피드백은 현실 검증의 가장 기본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반응—표정, 억양, 말투, 동의와 이견—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행동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무시할 때, 사람은 점점 자기 확신에만 갇히게 되고 현실 감각은 무뎌지게 됩니다. 반대로 피드백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조율한다면 상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섬세하게 조정해 나갈 수 있습니다.
화자는 단순히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이 상대의 맥락에서는 어떻게 들렸는지, 거의 피드백 속에서 나의 감정이나 주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내 언어는 더 정제되고 내 현실 감각은 건강을 유지하게 됩니다. 나의 언어 생활을 스스로 성찰하고 조정하는 노력을 이어가는 사람이 바로 화용론이 꿈꾸는 성숙한 화자이자, 건강한 현실 감각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
'삶을 위한 화용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의 진짜 의미를 알아가는 “의미 협상” (3) | 2025.05.27 |
---|---|
내적 대화(자기피드백) (12) | 2025.04.14 |
감정문해력과 자존감의 관계 (13) | 2025.04.07 |
감정문해력과 피드백 (14) | 2025.04.02 |
피드백이란 무엇인가 (22) | 2025.03.09 |